책정리
원저 : 김성민김성우,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
실린 곳 : philonatu, philonatu


이 책 서평은 내외신문 (2024년6월26일자)에 실렸습니다. 서평과 정리 발제문은 다른 내용입니다.



김성민과 김성우가 쓴 책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이음, 2024)

이 책을 읽고 이렇게 정리했다.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현실reality이란 완전히 벌거벗은 객체들의 나체가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은 강조한다. 현실은 객관적이지도 않고 중립적이지도 않다는 뜻이다. 현실은 이미지와 언어가 합쳐진 언어의 의미부여라는 라캉의 난해한 글쓰기를 아주 편안한 문장으로 되보여 준다.

이 책의 저자는(복수) 현실에 덧씌워진 이미지에서 패턴으로 안착되는 상징계와 개인의 상상계 사이의 관계를 책 전체에서 아주 진지하게 다루면서, 동시에 고상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우리들 현존하는 삶의 통증을 치유하려는 구체적 존재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라캉이 의도한 상상계와 상징계를 먼저 맛봐야 하는데, 상상계는 개인적 이미지이며 상징계는 사회언어적 이미지라고 설명을 한다.(이 책 34쪽) 현실은 상상계와 상징계로 원천적으로 염색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그런 염색된 현실을 환상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환상은 제거될 수 없는 현실의 몸 겉 피부이며 몸 속 세포이다. 그래서 환상은 제거 대상이 아니라 견뎌내고 껴안고 가는 것임을 슬럼프 증상을 갖는 모든 이에게 말해 주고 있다.

환상은 현실이며 그런 현실은 “텅빈 주체”로서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다. 텅빈 주체는 스스로 채우려는 욕망의 주체로 돌변하기도 한다.(56)

이런 욕망의 용트림은 의식 전면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꿈’이나 갖은 ‘증상’의 무의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묘사한다. 지젝에 의하면 이런 욕망은 미래에 생겨날 환상으로 간주한다. 환상은 이미지와 언어를 특정방식으로 꿰매어 현실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기호들을 뀌어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게 현실을 만들는 과정을 “누빔점”이라는 지젝의 표현을 제시하여 우리들이 갖고 있는 욕망의 좌표계를 공시한다.

우리가 말하는 주체란 결국 그런 좌표계 안에서 취하는 위치에 해당할 것이다. 지젝의 말처럼 “환상을 통해서만 우리 인간은 욕망하는 법을 배우며 욕망하는 주체가 형성된다”.(60) ‘텅빈 주체’는 환상을 통해서만 욕망하는 주체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체를 무의식적 주체라고 말한다. 앞서 말했듯이 환상은 현실과 분리될 수 없어서 환상을 제거한다면 현실도 사라진다는 점을 기억하는 일이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61)

슬럼프는 그런 환상의 소산물이다. 사람들은 슬럼프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슬럼프를 제거하려 하지만, 환상을 제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럼프는 제거가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증상을 즐기고 슬럼프를 환영하라는 이 책의 저자들의 언명이 도출된 것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그 자체로 고유문법과 논리를 따르기 때문에 비합리적 충동 영역으로 무의식을 설명하는 것은 프로이트를 오해하는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저자들 역시 프로이트를 그런 낭만주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64)

프로이트에서 무의식은 트라우마의 진실이 발언하는 장소인데, 여기서 발언은 고유의 문법과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앞서 말한 것과 같다. 무의식 역시 언어와 같은 구조라는 것은 라캉 분석의 요지이며 지젝은 라캉의 프로이트 비판을 수용한다.

이 책은 라캉과 지젝의 난해한 연관점을 다수의 영화 내러티브와 이미지를 사례로서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전체에 대한 반성없는 과몰입을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충성심이나 애국심이라는 전체라는 명분과 집단의 구호로 작은 개인이 붕괴되는 우리 모습을 비추고 있다.

전체와 집단이라는 우리 현실의 문제들을 접근하는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라캉과 지젝의 철학은 정말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나아가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실용적이기까지 하다.

라캉에서 개체로서 개인을 ‘작은 타자“라고 한다. 반면 언어로 형성된 사회적 타자를 ”큰 타자“big Others라고 한다. 우리 현실을 에워싼 무의식의 발언자는 작은 타자가 아니라 ”큰 타자“라는 것이 라캉의 지적이다.(69)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초자아, 기독교의 신, 유교의 하늘 등이 전부 라캉 ”큰 타자“의 사례들이다. ’한국인‘이라는 구성원의 동일함으로 이뤄진 정체성도 집단의 상징계이면서 ”큰 타자“의 하나이다. 우리는 나라는 개체를 대신하여 ”큰 타자“로 나를 포장할 때 도착증의 증세가 발현된다고 설명한다. 도착증 환자는 자신과 자식이 속한 큰 타자를 분리해서 보지 못한다.

’큰 타자‘ 역시 실체가 아니라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라캉의 관심은 이 책에서 확장되고 있다. 이 점에서 저자들은 큰 타자와 자신을 분리하려는 용기를 내도록 우리를 북돋워 준다. 큰 타자 안에서 ”결여“를 느끼게 되는 것이 욕망의 현실이다. 그러나 큰 타자 역시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면서 한 개인이 느끼는 결여의 공포심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용기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이런 용기에서부터 주체의 가능성이 엿보인다고 이 책이 말한다. 전체는 언어로 조직된 존재의 집이다. 개인에게 결여를 느끼게 하고 무의식적으로 결여를 강요하는 전체의 권력은 결국 주체를 고문하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개인들 즉 주체는 전체에 포섭되고 있다. ”주체는 언어 고문과 큰 타자의 욕망에 의해 소외되면서 형성된다고 한다. 인간의 욕망은 큰 타자의 욕망의 분신이라는 것이 라캉의 예리한 분석이다. 나의 욕망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속한 큰 타자일 뿐임을 말한다. (84)

욕망의 원천이 나라는 주체인지 아니면 큰 타자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욕망의 수수께끼이다. 이 책은 라캉의 분석에서 그치지 않고 지젝의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서 약을 사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아주 친절한 레시피이다.

환상을 통해서 타자에게 자아를 소개한다. 그래서 주체는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 속한다.

“반항하는 청년은 기존 체제를 바꾸려고 하면서도 기존 체제에서 도덕적으로 인정받으려고 한다”(90) 체제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의존성이 반항과 위반을 제약하는 한계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지젝은 들뢰즈와 차이를 보인다고 이 책은 강조한다. 들뢰즈는 의존성 없는 무정부주의적 욕망 해방을 원하지만, 지젝은 그런 무정부주의 욕망 해방은 가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91)

병적 상태로서 증상은 환자가 자각하는 이상한 상태이며 의학적 차원을 넘어서 암호화된 메시지이다.(98) 증상은 무의식 속에 숨은 진실을 알리는 전령이다. 그래서 지젝은 자신의 증상을 즐기라고 권유한다.(99) 예를 들어 공포증의 공포심은 방어 메커니즘이 과도하게 작동된 결과이다.(99)

방어 메커니즘이 증상을 발현시킨다. 공포증에서 벗어나려면 증상이 가져다준 메시지를 스스로 해석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해석이란 증상의 의미를 속으로 발화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주체는 외부 타자를 끊을 수 없어서 증상을 벗어날 수 없다. 단지 주체의 무의식과 외부 타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회복되면서 증상을 공포의 대상으로 볼 필요가 없어진다. 큰 타자 안에서 생겨난 증상을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100)

큰 타자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소위 초자아라는 관념에 따를수록 강박증과 불안증은 더 심해진다.(121) 소외된 주체는 큰 타자의 지배를 받으며 초자아의 도덕적 고문에 시달린다는 뜻이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는 대가가 바로 소외다.(122) 상징적 정체성이라는 이름을 얻는 대신 주체로서의 존재를 잃는다는 뜻이다.(122) 이런 점에서 노장자의 무명(이름없음)이 바로 “큰 타자”로부터 분리를 의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144)

분리를 거부하고 오히려 큰 타자에 착종된 것이 도착증이며, 극우주의나 근본주의의 행동양식에서 나타난다. 상징적 정체성으로 정치가들은 “국민의 뜻”을 거론하여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합리화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기업가는 “소비자의 욕구”라는 허위 정체성을, 일신교는 “신의 뜻”이라는 관념을 민족주의자는 “민족의 사명”이라는 구호를, 하다못해 행정 관료들조차 “조직의 명령”이라는 핑계로 행동한다. (150)

이제 그런 상징적 정체성에서 벗어나려면 소외와 분리의 경험을 거친 주체의 모습을 수용해야 한다. 그 모습이란 히스테리나 강박증 같은 신경증이다. 신경증은 정신이상자가 아니라 일상인의 한 모습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163) 히스테리는 컴플렉스이며 욕망과 열등감의 교차에서 오는 조급함이다.

반대로 강박증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욕망실현의 실행을 머뭇거리거나 늦추는 증상이다. 히스테리는 자신의 욕망을 잘 안다고 오해하며, 강박증은 자신의 욕망을 모른다고 하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강박증은 의심 속에서 실행을 못하지만 히스테리는 의심을 팽개치고 성급히 행동한다.(168)

욕망은 큰 타자라는 시스템에서 주어진 것이라서 욕망의 기준으로 주체의 탈출을 시도할 경우 결국 기존 시스템에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착종되고 만다. 이러한 자기모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책의 저자는 욕망 대신 충동의 접근법을 중시한다. 욕망은 결국 타협으로 귀착되기 때문에 지젝은 타협의 욕망 대신 혁명의 충동을 선택한다.

타협의 욕망과 혁명의 충동을 표로 나눠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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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을 통해서 환상과 현실이라는 이분법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환상은 허구이지만, 그 허구가 우리 현실을 이미 구조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상징 허구를 현실에서 빼내면 현실 자체가 없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181)

즉 환상의 프레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프레임을 변형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지젝의 강조점은 세상에서 주체로 살아남는 일은 세상을 삐딱하게 보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182) 환상 자체를 거부하고 진실을 보려는 욕망의 반항 정신은 오로지 기존 프레임과 타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183) 다시 말해서 환상은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횡단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환상이 일어난 좌표계를 바꾸는 일이다.

환상을 넘어서는 숭고한 현상은 없으며 오로지 충동과 만나게 된다.(184;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그리고 탈중심화란 주체가 일시적으로 자기소멸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자기 안에 낯선 자기와 대면하면서 자기가 속한 큰 타자의 상징이 붕괴된다.(205) 주체의 포기는 큰 타자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버린 것과 같다.(206) 큰 타자의 인정받기를 포기하고 자기the self를 구성하는 것이다. 주체를 해체한 이후 텅빈 주체가 새로운 주체의 모습이다.(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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