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근의 <노장철학>과 <제도와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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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곳 : 집중세미나, 집중세미나
정세근 선생님 책을 읽고 (2002-07-28, 토지문화관) 최종덕(상지대)

- 노장철학(철학과현실사,2002), 제도와본성(철학과현실사,2001)에 대한 서평과 토론 -



나는 일부러 <노장철학>을 나중에, <제도와 본성>을 먼저 읽었다. 후대를 다룬 책을 먼저 읽음으로써 나는 비전공자가 통속적으로 수용하는 노장 이해에 스스로 일침을 놓는 효과를 보았다.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위진현학의 연구가 거의 황무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는 말로써 <제도와 본성>을 시작했다. 그만큼 나도 그 책에서 새로운 많은 것을 공부했다.

저자는 위진현학과 노장을 제도와 본성이라는 새로운(?) 틀로 나누어, 문명(名敎)과 자연, 유와 무 사이에 놓여진 스펙트럼의 차이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런 차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풍유란 해석의 오류를 지적한 것은 나에게 흥미로웠다. 나는 이쪽 전공자가 아니라서 책의 내용을 갖고 따질 것은 없고 단지 나에게 떠오른 감각적 의심을 몇 가지 말하려 한다.

유가 책을 펼치면 첫 장부터 욕심을 버리라고 한다. 도가 책도 앞을 펼치면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데, 한 장을 더 넘기면 욕심을 버리고자 하는 그런 욕심마저 버리라고 한다. 그런데 불가 책을 보면 욕심을 버리려는 욕심, 그런 욕심의 근원 자체를 버리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버릴 것 자체가 없는 그런 비어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정 선생님은 <제도와 본성>에서 검약儉과 줄임嗇이라는 image象을 강조함으로써 책을 마무리했고, <노장철학>에서는 “無와의 만남”이라는 이미지로 책을 끝냈다. 그러나 불가는 검약과 줄임 혹은 “만나야 할 무”도 없는 것 같다. (물론 유식론에서는 다르지만) 그런데 유불선의 이런 차이는 있지만 유불선 모두 인간의 욕심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에 귀착되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쓴 이유는 동양철학 일반(전체가 아니지만)은 결국 수양론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 때문이다. 개인의 수양이건, 제도권(사회)의 수양이건 관계없이 말이다. 수양론으로 제한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고답의 성균관 유생이나 절간의 수행승이나 산속의 도사들 모두 엄밀히 따지고 보면 수양의 문제가 제일 관심사가 아니냐는 질문이다. 여기서 동양철학 전반에 걸친, 특히 노장철학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게 수양론의 문헌과 그 문장대로 따라 살면 현대에 사는 우리들도 정말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30대 대부분을 유럽에 살다 한국에 오면서 당시 내가 느낀 것은 한국이 서양보다 더 서구적이라는 점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그 느낌은 역시 느낌이어서 엄밀하게 언명화 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느낌이 반드시 옳다는 것도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동서의 구분이 이제는 더 이상 지리적 구분이 아니라 동서와 관계없이 사회제도와 개체적 인간성 사이에 존재하는 구분일 뿐이라는 점이다. 흔히 말해서 “사람 나름이지”라는 말이다.

동양은 실천 서양은 사변이라는 편협된 틀에서 나는 동양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동양철학 전공자들 모두 (혹은 대부분) 실제로 그 개인 역시 욕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렇다면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데 어떤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 문제를 말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본질과 현상의 이분논리를 먼저 보자. 어느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게 교회가 이렇게까지 황폐해져야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답변하기를, 교회가 안고 있는 병리적 현상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대적 상황이 낳은 현상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한다. 다시 말해서 현상은 껍데기여서 현상의 문제가 다소간 있다손 치더라도 속의 본질은 여전히 좋은 것이어서 지금의 문제가 되고 있는 현상도 얼마 후에는 고쳐 질 것이라는 답변이다. 이 말은 본질과 현상이 다르다는 전형적인 따로국밥 논리에 의존한다. 이 논리는 이미 서양 고대철학과 기독교 신학에 정착된 이분법의 틀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는 서구사상 밑에 깊이 깔려 있는 자연/인간, 하늘/땅, 존재/인식, 정신/물질, 주관/객관의 이분 구조와 맞닿아 있다. 반면 노장/유가 사상은 본질/현상의 논의조차 설정되지 않은 齊一的 구조를 보인다. 아예 카테고리가 달라서 서양은 이원구조, 동양은 일원구조라는 대비적 표현도 맞지 않는 것 같다. 어쨌든 이야기를 앞으로 돌려서 동양철학 공부하는 사람에게서 공부는 공부, 실천은 실천이라는 따로 국밥 논리는 영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주제는 동양철학 공부하는 사람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동양철학의 齊一的 논리를 수양론으로 좁히지 말고 다른 틀로서 설명해 보면 어떻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 다른 틀이란 것은 뭐 색 다른 것이 아니라 (동양적) 자연주의로 동양철학 일반을 설명해 보자는 뜻이다. (불교는 약간 다르지만,) 나는 비전공자라서 기회가 없었지만 평소 유도를 자연주의의 틀로 설명하고 싶어했다.

이유1 :
선진 유도 문헌에 설득력/논리적 근거로 무수히 등장하는 동물/산천초목 등의 자연물 현상 _ 대붕, 개구리, 달, 물 새,,,,, -

이유2 :
서양 파르메니데스 이후 유의 절대적 근거인 존재와 자연물 사이에는 넘지 못 할 간극이 있지만, 전국시대 전후로 설정되는 음양/오행, 도의 틀은 자연물의 image象으로부터 도출 된 것으로 생각된다. (정교수 말대로)

이유3 ;
서구 고대철학은 보통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전이하는 과정을 그렸다고 하는데, 동양의 백가사상은 자연의 시대에서 인간(사회)의 시대로 전이하는 과정을 그렸다고 말하려 한다. 문무왕, 탕, 요순 그보다 더 오랜 과거는 서양적 신화의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일종의 자연화 과정을 숙성하게 하는 무의식의 과거라고 보면 좋겠다. 기억이 확실히 나지 않지만 아주 없었던 것이 아닌 지난 자연의 아스라한 기억들이다. 이를 시간적 玄이라고 말하면 딱 맞는 것 같다. 노장(특히 장자) 에 등장하는 산천초목과 동물들의 유비는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유비논법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연화 논법에 해당한다.


- 만약 이런 자연주의에 조금이라도 고개를 끄덕인다면, 노장과 현학 (특히 왕필) 은 자연스레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제도와 자연은 배중율의 관계가 아니라 자연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연속의 관계라는 점이다. 현학은 제도!, 노장은 자연! 이라는 언명 속에는 이미 제도와 자연은 다른 것이라는 이원논리가 은연중에 끼어 들어 있다. (정선생님에 대한 비판임) 이런 이원 논리에 구속되지 않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제도는 억지로 생긴 것이 아니라 그러저러하게 (유연한 “저절로”) 생긴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왕필의 생각이었나 본데, 이런 생각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한 인간의 자연화와 그 인간이 속한 군집(사회) 의 자연화를 동일한 과정으로 여길 수 있는지를 먼저 따져야 하는데, 이 논의를 하려면 진화론적 사유의 구조를 말해야 하고, 이는 아주 골치 아픈 일이어서 나중에 시간 나면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내경에서는 세계(우주), 사회, 인간, 심리의 4 가지 기틀이 동형적(isomorphism)이라는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유념한다면 더욱 왕필과 노장은 연속적 스펙트럼에서 정도 차이일 뿐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점은 정 선생님이 아니라고 할 터인데 나중에 여차저차 들어보기로 하자. 자연주의는 필히 연속의 사유와 행위를 수반한다. 이와 연관하여 정 선생님은 인위, 유위는 개미 한 마리 호박씨 하나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이점에 대해 원래 나도 동감하지만, 요즘은 약간 다른 생각이 나를 자꾸 치민다. 유의 전형적인 장르인 자연과학을 통해서 개미와 호박씨 나아가서는 인간도 복제 될 수 있다는 위협적인 생각이 자꾸 든다. 개미를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은 貴無 이며 혹시 만들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은 崇有에 이어진다. 無는 통찰과 진화와 포월(김진석 교수 표현), 돈오 성향적이지만 有는 점진적, 창조와 초월 (형이상학,기독교), 돈수 성향적이다.

무의 범주에서는, 욕심만 버리면 누구나가 성인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말들 하지만, 참으로 요원하고, 좀 할라치면 나름대로 상당한 공부가 필요하다. 욕심 버리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데 책에서는 쉽다고 자꾸 말하고 있다. 모자라도 노력만 잘 하면 채울 수 있고, 아니면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면 욕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다고 하는데, , , 보통 우리네 소인배들이 정말 그리 될지 잘 모르겠다. 유의 범주에서는 시장통 나부랭이 들도 자기가 얻을 수 있는 물질적 욕망 내에서 그 욕망에 자족할 수 있다. 욕심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또 그 범위 안에서 오히려 자족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서양 사람들은 모두 물질에 빠져있다고 욕하기에는 유의 실제적인 능력을 무시하는 처사인 듯 하다. 무를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운데 물질에 빠져있는 사람들도 많은 듯 한데. . .


동양 열기, 해체론,

서양에서 말하는 존재, 이데아, 실체, 절대자, 본질 등등은 대체로 유일성, 절대성, 정지성, 완전성, 불변성, 무모순성, 무시간성, 보편성 등의 추상적 성질을 띄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재한다는 점이다. 나중에 기독교에서는 인격성이 추가된다. 이를 존재 일반이라고 하자. 서양의 존재가 갖는 감성적 접근법이 있을 수 있는데, 서구 존재는 차갑고cold, 건조하며dry, 무색colorless이라는 점이다. 이성이 감성의 색깔과 따듯함 그리고 축축한 생명수를 모두 제거시킴으로써 객관/주관, 물질/정신, 세계/자연, 인간/세계, 본질/현상, 법칙/운동의 분리를 만들어 놓았다. 이로써 형이상학과 기독교 신학, 자연과학, 물질적 풍요의 성과를 가져왔지만 원래 색깔을 지녔던 삶의 소외와 위기가 왔다고 한다. 이성의 힘으로 축조한 실체의 감옥에 갇힌 인간을 구원하고자 모든 기틀을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가 서구에서 이차대전 이후 잦아졌는데 그들의 해체 시도가 과연 진정한 해체인가라는 질문이 강하게 요청된다.

노장의 도의 특징을 말하는 부분에서(77-79쪽) 염과 담淡을 말하는데, 염은 조용하고 평안한 상태이지만 달리 보면 남이 좀 흔들어도 그 마음이 도무지 안 통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담은 욕심에 매이지 않아 담담하지만 달리 보면 아무 맛도 없어 건조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도의 염과 담은 서구 존재의 cold, colerless, dry 와 겉보기에 닮아 있다. 그러나 서구의 존재는 그것이 무미건조하여 비극을 낳게 하는 원천이 되어 왔지만 노장의 도는 그것이 담담하여 사소한 인간시비에 휘말릴 필요가 없어 희극을 낳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비극은 철저히 崇有의 장르에서 비극적 세계에 대한 흠모를 자아내지만, 희극은 더 이상 무엇을 할 필요가 없는 貴無의 장르에 속하는 것이어서 생태적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놀기에 딱 좋다. 비극은 과학탐구의 원천이며 자본축적의 동기가 되기는 하는데, 그것이 과도하면 과불급이라 현대산업사회에서는 오히려 이것이 너무 문제되어 해체론의 과제는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어 보자는 데 있다. 그런데 현대서구사회에서 과학탐구와 자본축적의 유발심은 거의 인간 본능과도 같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소외의 문제는 너무 심각하여 뭐 하나를 고쳐보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성의 틀이다. 그래서 이성을 해체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불편함과 지나온 잘못 된 점을 개선하여 좀더 정교한 이성의 축조물을 쌓아보자는 것이 서구 해체론의 핵심이다. 이것도 모르고 서구 해체론이 그들의 숭유를 해체하여 동양의 귀무로 돌아오니 “참으로 동양은 좋은 것이오, 지 잘난 서양은 결국은 동양으로 돌아오네” 라는 생각은 착각이며 일종의 신화며 허상일 뿐이다. 그들의 해체는 덜 성숙한 이성을 더 정교한 이성으로 개선하자는 것이며, 그 개선책 중에 동양사유를 받아들이는 것도 있기는 한데,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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