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정의 양명학 서평

실천하는 철학자 김세정이 쓴 책,

『양명학, 돌봄과 공생의 길』 (2020, 충남대 출판문화원) 서평

서평자 : 최종덕



지행합일의 철학자 김세정은 양명학과 관련하여 이미 『왕양명의 생명철학』(2006)이라는 작품을 낸 적이 있다. 이후 일반인도 양명학의 철학을 쉽게 읽을 수 있게 친절하면서도 전체를 관통하는 신나는 책을 내었다. 이 책은 양명학을 처음 세운 왕수인(1472-1528)의 『전습록』을 단순히 해설한 것이 아니라 현대문명에 처박혀 사는 우리들이 미래를 어떻게 활기있게 살 것인지를 보여준다.

저자 김세정은 양명학을 통해서 현대인에게 상실되고 손상된 ‘돌봄과 배려 그리고 공생’의 마음을 내 안에서부터 회복할 수 있다는 중심을 설득력 있게 쓰고 있다. 『전습록』이라는 어려운 고전을 우리에게 딱 맞게 설명해 준 문헌학적 충실성과 동시에 천지만물이 하나라는 저자의 절실한 깨달음으로부터 그런 강한 설득력이 나왔으리라고 여겨진다.

이 책에서 저자가 설명해 준 양명의 지혜를 살펴보자. 양명학의 철학은 전습록을 통해서 전통 유학의 흐름을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당대 주자학에서 볼 수 없었던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양명은 왕수인의 나이 37세에 나온 ‘심즉리’의 철학과 38세에 나와 세상을 흔든 ‘지행합일’의 철학 그리고 50세 나이로 천지만물 일체설로 잘 알려진 ‘치양지’致良知의 철학을 포함한다.

여기서 천지만물은 생생하고 쉼이 없으며不息 그 가운데 새로움을 창출하는 자기조직성이라고 저자는 풀고 있다. 서양의 네이처를 번역한 자연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천지만물’일 터인데, 양명학에서 말하는 천지만물은 그런 물질적 자연으로 그치지 않고 사람의 마음과 천지의 마음이 더불어 새겨져 있는 자연이다.

그런 천지만물은 들숨과 날숨 그리고 흡입하고 배출하는 신진대사 작용을 하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자기 생명의 원인을 자기 안에 스스로 그리고 저절로 품고 있다. 그래서 저자 김세정은 물질의 자연과 마음의 자연을 합친 형용의 개념으로 “자기조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이 책, 236)

사람의 마음을 가르는 기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양명의 시비지심은 맹자의 시비지심을 더 확충시켜서 올바른 판단과 그런 판단을 통한 실천을 포함한다. 행동으로의 실천은 타자에 대한 공감과 통각을 거치면서 실현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자기조직성이며 저자는 이를 ’유기적 생명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천지만물의 일체를 이해하려면(깨달으려면) 사람의 마음이 천지의 마음에 합치됨을 파악해야 한다. 합치라는 표현은 아주 추상적이지만 양명학은 합치가 가능하기 위한 구체적인 길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망막에 백태가 끼게 되면 세상이 흐리게 보이듯이, 개인의 사욕이 마음에 끼게 된다면 양지는 드러날 수 없고 마음에 장애물만 가득해진다.

그렇다면 마음의 본성이 아무리 청정(영명靈明)하더라도 사욕에 갇힌 해악만이 횡행해진다. 사욕을 걷어내기 위한 구체적 행동양식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앞에서 천지만물의 마음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기존의 성즉리에서 심즉리로의 변화를 대신 말해 준 것이다. 심즉리란 마음이 곧 본성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본성은 감정의 마음을 포괄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개별자의 본성으로 국한되지 않고 하늘의 마음으로 접속되었다는 점이 중시된다. 인간의 마음은 만물의 마음과 ‘감응’한다는 것인데, 거꾸로 말해서 누구나 감응만 이뤄내면 성인으로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성인이란 그 마음이 순수한 천리로서 인욕人慾의 섞임이 없는 사람이다.”(이 책 265) 성인의 마음은 천지만물과 한 몸으로 삼으니 안과 밖, 멀고 가까움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이 책 266)

성인은 차별적인 존재도 아니고 특별한 존재도 아니고 선천적으로 부여된 존재도 아니라 누구에게나 감응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열린 존재라는 점이다. 바로 그런 열린 지혜가 심즉리의 양지良知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양지는 누구에게나 갖춰진 생득적 마음이다. 양지의 마음을 실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인이 된다는 점에서 양명학을 평등론의 철학으로 소개한다.(이 책 302) 양지양능良知良能에서 양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며 양능이란 배우지 않더라도 능한 것을 말한다.(309)

양지는 영명靈明하여 천지만물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연결하여(응대하여) 자각할 수 있다고 한다.(311) 양지의 영명성이 있어서 개인의 정신 혹은 개인 의식 수준에 머물지 않고 우주적 차원의 생명력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저자는 풀이하고 있다.(312)

개인의 생명과 우주의 생명이 만나게 되는 이유는 양명의 앎이 제도나 규범이 아니고 억지나 당위도 아니라 순응성에 있다는 데 있는데 여기서 순응이란 쉽게 말해서 자연의 순리를 안다는 것이다. 이제 양명학은 현대 생태학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양지를 실천하는 문제가 가장 큰 과제다. 양지를 실천하는 수준에 따라서 도덕적 행동양식의 층차가 생기기 때문이다. 개인 욕심이라는 백태가 마음을 가려서 실천과 행동이 멀어지니 우리는 그런 층차를 욕심이라고 말한다. 욕심의 장애는 사람마다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 차이는 생득적이라기보다 환경적 요소 때문에 생겼다고 본다.

그 층차를 굳이 나눠보자면 (1)원래부터 욕심의 장애가 끼지 않은 사람들生知安行者, (2) 힘써 배워서 장애를 벗겨내고 자기 안에 숨겨져 있었던 양지를 되찾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스스로 반성하고 학습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이다.學知利行者 (3) 한편 장애가 너무 끼어서 사욕의 습관이 골짜기로 패어 양지를 찾는 실천행동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困知勉行者들의 층차다.(305-6)

이런 3번째 층차의 사람들조차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그 판단에 따라 실천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주체성이 정말 중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307) 개인 사욕의 후천성을 잘 보기 위해 저자는 전습록에 나온 사욕에 대한 2 가지 문헌을 인용했다.

첫째 사욕은 후천적이고 양지는 선천적이라는 점이다. “사람들 중에 누가 뿌리가 없겠는가? 양지가 바로 하늘이 심어준 영명한 뿌리이니 저절로 쉬지 않고 생성한다. 다만 사욕이 누가 되어 이 뿌리를 해치고 막아서 자랄 수 없을 뿐이다.” (전습록 황수역 244조목)

둘째 후천적 습관으로서 집착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점이다. “칠정이 그 자연스러운 유행에 따르는 것은 모두 양지의 작용이며 (칠정 그 자체를) 선과 악으로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집착하는 것이 있다면(집착의 장애가 끼면) 안 된다. 칠정에 집착이 있으면(끼면) 모두 慾이라고 하여 그 집착이 양지를 가리게 된다.”(전습록 황성증록 209조목; 이 책 340)

저자는 전습록의 한 어구를 신선하게 번역해 주었는데, “만물일체의 양지가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지만 사사로운 욕망의 장애물들은 양지를 가려(차폐시켜) 경쟁과 배제, 편벽과 고루함, 교활과 음험의 해악을 낳는다”(양명, 대학문; 답섭문울 180조목; 이 책 344-5)는 표현은 우선 나부터 잘 새겨들을 말이다. 양지가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런 해악이 해소되지 않고, 치양지致良知의 주체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346)

양지는 홀로 드러나지 않고 감정이라는 인간 요소의 작용으로 드러난다. 이런 감정요소로 말마암아 집착이 내 마음에 끼게 된다.(341) 감정의 측면인 칠정, 즉 기뻐하고 화내고 안타까워하고 무서워하며 정에 빠지거나 미워하고 욕심내는 칠정은 그렇게 되면서 행동중독처럼 집착 행동의 습관양식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집착행동이 선천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후천적으로 강한 중독성을 가지기 때문에 집착은 정말 무서운 장애물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배웠듯이, “무서워서” 피하고 그냥 그럭저럭 지내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무서움에서 과감히 벗어나도록 스스로 결정하라는 것이 양명의 지혜다.

양지가 공생의 치양지라는 실천의 길로 접어드는지 아니면 집착의 사욕으로 빠지게 되는지는 아주 중요한 마음의 기로이다. 서평자는 이 두 마음의 양식이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하라는 이분법적 기로와 다르게 이것과 저것이 내 마음 안에 같이 공재하고 있는데, 다만 행동의 실천여부 즉 지행합일의 여부로 마음의 양식이 겉으로 드러나게 될 뿐으로 생각한다. 서평자의 이런 생각의 태도를 기반으로 양명학의 심즉리를 다음 표처럼 구조화했다.

two-track of Mind

나는 이 책에서 물物의 의미를 잘 배웠다. 물物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 의지에 의해 진행되는 실천행위를 말한다. 우리 일상언어에서 사물事物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그 사물의 事가 곧 物의 진짜 의미다. 물이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내 마음의 연관적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물이란 타자를 대하는 관계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물은 事다. 사란 부정한 것을 바로 잡아 선을 행동하게 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을 곧 格이라고 한다. 양명학의 물은 주자 格物致知의 格物처럼 외향적 격물에 이르는 (이를 至) 대상이 아니라 정(바를 正)하게 실천하는 행위 유발의 관계를 말한다.

주자에서 말하는 격물치지의 격물과 다르게 정심正心으로서 격물의 관계론이 양지에 이르는 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294)

物이 事라서 의지가 작용하는 곳에는 반드시 거꾸로 物이 있는 셈이다. 의지가 어버이를 섬기는 데 작용하면 어버이 섬기는 관계(事) 자체가 하나의 物이다. 의지가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작용하면 정치가 물이며, 의지가 글 읽는 공부에 작용하면 공부가 물이 된다.

양명학의 왕양명은 당시 문과 관리가 아니라 무과 관리였기 때문에 치안이나 송사에 관련한 행정 업무를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전습록에는 송사에 관한 사례가 자주 나오는데 그 의지가 송사에 작용하면 인간 대소사가 물이 된다는 것이다.(답고동교서 137조목; 이 책 359) 즉 物이 事라는 말은 物이 감응과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양지에 이르려면 즐거워야 한다는 맥락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즐거움은 마음의 본체이기 때문에 숨겨진 본체를 되살리려면 실제로 즐거움 없이는 어렵기도 하겠다.(여황면지; 이 책 388) 즐거움은 고상한 취미로서 향유가 아니라 일상 속의 정감 범주이다. 단지 마음 안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388)

저자는 양지의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긍국적으로 대동사회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한다. 대동사회란 이 책의 제목에서 보듯 돌봄과 배려 그리고 공감의 마음을 회복하면서 가능해진다. 장애물을 걷어내고 양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치양지의 길과 지행합일의 길을 저자는 제시한 것이다. 공감과 돌봄의 마음은 주요한 특징을 갖고 있는데, 다양성, 온전성, 평등성, 그리고 유기적 상보성이다.

다양성은 각각의 일자리에서 타자를 배려하는 일이다. 온전성은 문명사회에 중독되어 피폐된 경쟁하는 마음을 고쳐서 덕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당대 사농공상을 타파하려 했던 평등성의 양명학 정신은 지혜를 자본으로 계층화된 현대인에게 저항을 통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현대적 자유의 평등성 철학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유기적 상보성이란 사회 내 혹은 집단 내 구성원들 사이의 타자 돌봄의 상관성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기를 이 책은 교양도서로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이 책 『양명학, 돌봄과 공생의 길』의 독서는 나에게 생활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실천의 계기와 동력을 북돋아 주었다. 이웃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특히 아는 것은 많은데 머뭇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장유유서, 부자유친, 부부유별, 군신유의 층차와 무관하게 그런 분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도록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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